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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도 좋고 책은 더 좋고!

by 달리뷰 202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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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

하루키를 처음 알게 된 건 이십대 초반쯤, 『상실의 시대』를 통해서다. 꿈꾸는 듯 몽환적이면서도 지독히 현실적인 새로운 세계에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그후 『해변의 카프카』 『기사단장 죽이기』 『1Q84』 등의 다른 소설과 몇 권에 에세이도 흥미롭게 읽었다. 

 

그런데 단편소설은 읽을 생각을 못하다가, 소설집의 독특한 제목에 끌려 손이 갔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니. 어떤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걸까. 

달리뷰가 리뷰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표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동네 출판, 2014.8.28 초판 발행, 『여자 없는 남자들』 (사진출처: 달리뷰)

이 책의 전반적인 느낌은 가벼우면서도 빼곡하고, 능수능란하면서도 서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총 일곱 개의 단편 중 첫 작품인 '드라이브 마이 카'는 특히나 몰입이 잘 됐다. 어쩌면 내가 운전을 막 배울 때 읽어서 더 그런 줄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걸 재밌게 읽은 게 나뿐만은 아닌지 이 단편소설은 2021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담백하고 묵묵한 최고의 여자 운전기사 '와타리' 

소설은 중년의 남자 배우 '가후쿠'가 '여자의 운전'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여자가 운전하는 차를 적잖이 타보았지만, 가후쿠가 보기에 여자들의 운전 습관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뉘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난폭하거나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신중하거나. 후자가 전자보다 - 우리는 그 점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 훨씬 많았다.
(『여자 없는 남자들』 p.9)

 

대체로 동의가 되면서도 '굳이 남녀를 갈라서 생각할 건 뭐람' 하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그는 지극히 평범하게 운전하는 여자들, 운전에 아주 증숙한 여자들의 경우에도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운전을 잘 하더라도 남자들이 운전할 때에 비해 더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서. 소설 속 인물 가후쿠의 입을 빌어 소설가 하루키가 약간의 변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운전을 제외하고는 남녀를 구별해 생각하거나 남녀의 능력차를 느낄 때가 거의 없고, 오히려 여자들이 더 세심하고 주의깊다는 생각도 한다고. 

 

아무튼 이런 가후쿠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분간 임시 운전사를 기용하게 됐는데, 그게 '와타리'라는 이십대 중반 여자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인상, 그러나 운전을 끝내주게 잘 하는 여자. 가후쿠는 그녀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함을 느끼며, 자신의 연극 대사를 외우거나 깊이 잠이 든다. 

 

난 소설을 읽으며 내내 와타리가 궁금했다. 그래서 영화가 개봉했을 때, 와타리를 보러 영화를 봤다. 내 상상보다는 둥근 느낌이었지만 나름 잘 표현했다고 본다. 마지막에 책과 다른 부분은 다소 아쉽기도 했지만. (책 원작 영화를 보고 만족스러웠던 적은 몇 번 없다. 이를테면 '눈 먼 자들의 도시'와 '작은 아씨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공식 포스터

 

차 안에서 진솔하게 나누는, 서글픈 미스터리 같은 이야기들

가후쿠와 와타리는 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혹 나누는 이야기 속에는 어떤 신뢰 같은 게 들어있다. 가후쿠의 죽은 아내 - 아주 아름답고 인기가 많던 여배우 - 에 대한 이야기, 와타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 같은 것들은 왠만한 사이에서는 나눠지지 못할 대화다.

 

그리고 이야기꾼 무라카미 하루키의 진면목이 여기서 드러난다. 희한하면서도 궁금한 이야기 맥을 만들어 독자를 멱살잡고 끌고간다. 

 

가후쿠 부부는 비록 태어난 지 사흘 된 아이를 잃은 비극을 겪었지만, 그 전에도 후에도 부부로서 잘 지낸다. 그러나 가후쿠는 아내가 가끔 같이 드라마를 찍는 상대 배우와 외도를 한다는 걸 알았다. 알고 있으면서도 묻지 않았고 따지지 않았다. 아내의 외도가 정말 몸뿐인 외도고, 드라마가 끝나면 그 관계도 끝난다는 걸 알았기에, 괴로우면서도 묻어둔다. 

 

아내는 암으로 죽는데, 그 이후 아내의 섹스 파트너였던 남자 배우 한 명과 가후쿠는 술친구가 된다. 

"부인과 그 사람이 잤다는 게, 가후쿠 씨가 그 사람과 친구로 지내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반대야." 가후쿠는 말했다. "내가 그 남자와 친구가 된 건 내 아내가 그와 잤기 때문이었어."
(『여자 없는 남자들』 p.36)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도쿄의 술집에서 만나 죽은 가후쿠 아내를 그리워 한다. 물론 가후쿠가 아내와 그의 관계를 안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 채. 

 

가후쿠는 그 남자 배우와 특별히 큰 사건을 만들지 않고 관계를 끊는다. 그리고 와타리에게 그때를 설명하면서 죽은 아내의 중요한 일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음에 괴로운 심정을 담담히 토로한다. 그리고 와타리의 대답은 얼마쯤 가후쿠의 풀지 못한 물음표를 해소해준다.  

 

무라카미 하루키, 아주 좋아하지 않음에도 계속 찾아 읽게 되는 작가

하루키는 만년 노벨문학상 후보다. (사실 이제는 안 될 거 같지만서도)

 

그냥 나만의 뇌피셜이지만 하루키가 책을 내면 늘 인기 있는 이유도, 노벨문학상 후보로 항상 거론됨에도 수상은 못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의 장편들은 꽤 흥미롭고 술술 읽히지만, 모두 다른 옷을 입은 같은 사람처럼 보인달까. 모든 작가가 그런 것 아니냐, 한다면 이 역시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지만서도. 

 

아무튼 난 앨리스 먼로나 로맹 가리를 좋아하듯 하루키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책을 내면 찾아 읽게 된다. (이게 좋아하는 거라고 말한 이도 있었지) 특히 단편집은 부담없고 경쾌하게 더 기꺼이 읽게 된다. 앞으로 하루키는 또 어떤 글을 쓰려나. 

 

2018년에 내한해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사진출처: 중앙일보 2018.11.6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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